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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초 교사분을 애도하며, 선생님 이야기.

서이초교사애도.

이런 저런 선생님들.

지금도 적지 않은 나이지만 다로드에겐 선생은 없다. 선생님이 있다.

물론 선생이나 선생님이나 화자의 마음가짐에 다르긴 하지만 둘 다 존칭이다.

양천초교를 다닐때의 기억이다 .소풍이랍시고 돈 100원을 받아서 20원짜리 뽀빠이를 5봉지 사가고

뭔가 허전해서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싸서 바리바리 들고갔다. 점심시간때 뽀빠이 먹다가 목이 막혀서 켁켁 거리니

선생님이 사이다를 주신다. 감사합니다.

다로드가 광주의 수창초등학교를 다닐때 이야기다. 아마도 5학년때가 아닐까.

무슨 공사를 하나 보다. 뭐지?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기다. 그 때는 무슨 가정방문이 있었나 보다.

내가 큰 딸이 중학생이 되는 학부모가 되도 가정방문은 없었는데 아마도 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 다녀가신 뒤에 그리고도 한 참 뒤에 할머니께서 말씀하신다.

선생님이 만약 자신이 명을 다하지 못해 일찍 죽는다면 아마도 다로드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예를 든다.

다로드가 식중독이 걸렸었는데 기운이 없다 싶은데 쉬는 시간에는 책상위를 날라다닌다는 것이다.

응. 그랬다.

그 분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착잡하지만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어릴때는 원망도 했지만 그 건 잠깐 이었다. 나에겐 선생님이셨으니 말이다.

그래. 배움이 있다. 어쨌든 선생님을 통해서 배우는 시기다.

어릴때는 참 크게 보인 거리였는데…, 골목이다.

성남의 대원초등학교를 다닐때 기억이다.

뭐 딱히 이런 저런 기억은 나지 않는데 당시에는 학부모가 학교에 방문해서 선생님을 만나야 하는

시간이 있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학교에 와서 선생님을 만났고 나의 어머니도 같았다.

그 시간은 분명 쉬운 발걸음은 아니었으리라. 군부독재가 가열차던 권위주의 80년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물어봤다.

초등학교 2,3학년이 어떻게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엄마, 선생님한테 얼마 줬어요?”

그런 시기였다.

중학교 2학년때의 선생님은 어머니의 성과 같은 서씨였다.

뭐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으나 2학년으로 올라가지 않은 얼마되지 않은 뒤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다.

“올 해는 장학금 타야지?”

그 분은 다로드의 가정환경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셨고 다로드도 말씀을 드렸다.

너무 답답했는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다고 대단하게 드라마틱하거나 역전극은 없었다.

그 분은 서 재필 선생님이시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선생님을 기억하고 나름 잘 살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때에도, 대학교때에도 존경까지는 아니어도 기억에 남는 선생님들이 계시다.

뭐 그런 지금의 삶이나, 혹은 그 때의 삶에 투영된 내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그런 것들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서이초 선생님을 보며

20대 초반의 선생님.

내가 그 나이때 뭐 했던가? 나름 군인으로 뭐 재밌게 생활할 때였는데

그 분은 인생 최대의 난제를 풀고 있었던 것이다.

다로드는 중학생과 초등학생을 키우고 있지만 다로드가 지침처럼 가지고 있는 것은

“선생님은 옳다”라는 명제다.

다로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옛날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가르쳐 주셨던 분이고

지금은 나의 아이를 가르쳐 주시는 분이다.

그 것이 직업적인 것이든 의무적이든 뭐 사회적인 활동이라 할 지라도

그 활동으로 인해 내가 부족한 가르침을 채워주는 것이다. 그런 분들이기에 그 것을 인정한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도 모르게 습득해 온 것이 아닐까.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는 온 마을이 힘을 쏟아도 부족하다고 한다.

가르침은 오죽 할 것인가.

그 것을 선생님이 하고 있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